수천 킬로미터를 흐르며 다양한 생명을 잉태하고 회복시키는 거대한 강의 원천은,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흐른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된다. 이 물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이끈다. 물은 길잡이 없이도 크고 작은 바위틈을 따라 끊임없이 생명을 향해 흐른다. 양이 많든 적든, 물은 자신의 여정을 다할 때까지 흙 사이를 헤치고 뿌리를 적시며 나아간다. 이것이 물의 본성이다.
생명의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물방울은 또 다른 물방울과 만나 몸집을 키워간다. 첫 물방울의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생명의 길에서 만나는 물은 언제나 완전한 하나다. 물은 땅 아래 수로를 가득 채우면, 산 중턱이나 대지를 뚫고 나온다. 햇빛 아래서 푸른 잎을 적셔 오색 꽃을 피우고 시내를 이루게 된다.
시내는 땅 위와 땅 아래에 사는 수많은 생명이 함께 부르는 생명의 찬가다. 시내는 쉬지 않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간다. 품고 있는 생명만큼 흐름의 폭이 넓어지고 속도도 빨라진다. 물의 존재 증거는 바로 생명에 있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도 굴하지 않는다. 장애물을 서서히 분해해 굽잇길을 내고, 견고한 바위 앞에서는 소용돌이로 힘을 모은다. 그 힘으로, 보이는 장벽을 부수기보다는 자신을 산산이 부수어 웅장한 굉음과 함께 하늘에는 무지개를 피우고 아래로는 바위의 뿌리를 휘저으며 떨어지는 폭포가 된다.
폭포의 장엄한 굉음은 자신을 이겨내는 울부짖음이고 생명을 잉태하는 절규다. 생명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장벽에 대한 거룩한 분노다. 그렇게 바위 성에 갇혀 말라가는 강바닥에 다시 생명의 물이 흘러,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채 남은 숨을 몰아쉬던 대지의 생명을 회복한다.
태국어로 어머니를 ‘메’라 하고, 물을 ‘남’이라 하며, ‘강’을 ‘메남’, 즉 ‘어머니의 물,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젖은 자신을 녹여 만든 생명의 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그 사랑에 근거한다.
선교는 그 사랑의 물방울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강을 이루는 것이다. 물이 생명을 중심으로 시내가 되고 강이 되듯, 선교도 생명을 중심으로 맑은 시내같이 연합하여 쉬지 않고 흘러가야 생명의 강이 될 수 있다. 쉬이 분해되지 않는 바위 같은 벽을 만나면, 생명을 향한 폭포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며 낮은 곳을 향해 떨어져야 한다.
사명은 생명을 위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젖을 먹일 아이가 없는 어미의 젖은 마르고 만다. 생명을 품지 않은 물줄기가 고갈되듯, 선교가 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젖을 짜내야 할 생명은 없고 대신 물을 흡수해 저장만 하는 물먹는 하마만 있어서다.
한 방울의 물이 자기희생을 반복하며 수천 킬로미터의 강폭을 채우듯, 선교도 자기희생을 통해 생명의 강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생명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선교가 재생산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회복시키는 거룩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살아있는 교회에는 결빙과 해빙이 있다. 생명의 물방울은 그 사이에서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생명 대신 돈이나 명예를 좇으면 긴 결빙만 이어질 수 있다. 물방울은 흘러가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힘도 생산한다. 물이 지하를 먼저 흐르듯 교회는 보이지 않는 마음 밭을 먼저 적셔야 한다.
마음 밭이 적셔진 자들만 거룩한 지체로 하나 될 수 있다. 마음 밭을 적신 물이 영혼의 햇빛을 만나고 잎을 적셔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야생화를 피우는 물줄기만이 장애물을 녹이고 굽잇길을 만들어 강이 되고 폭포가 되어 자신을 산산이 부숴뜨릴 수 있다.
한국교회는 생명 예찬을 회복해야 한다. 목사와 선교사가 복음의 물로 자신을 먼저 적시고 양들에게 의존하기 전에 먼저 자기희생을 통한 자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희생을 보상이 아닌 사명으로 여겨야 하며 이런 자들의 연합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평지로만 흐르려 한다는 것이다. 장애물 앞에서 당황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고, 하나 되어 천천히 상대를 녹이며 복음의 굽잇길을 만들어야 한다. 장벽이 높다면 그 벽에 부딪혀 소용돌이를 일으켜 힘을 모으고, 그 벽을 넘어 산산이 부서지는 복음의 폭포가 되어 장벽의 뿌리를 파헤치며 마른강에 다시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자기를 희생한 폭포의 웅장하고 장엄한 소리로 죄인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폭포는 장애물 앞에서만 만들어진다. 모든 교회와 선교지에 거룩한 폭포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한다.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좁은 협곡을 긴장하며 흐르면서 전율도 느껴보고 바위와 부딪혀 불필요한 자아를 부숴가야 한다.
교회의 성숙과 선교를 위협하는 장애물은 모두 내부에 존재한다. 자아를 녹여 생명의 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고, 사랑의 물방울을 흡수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폭포 소리가 나는 교회나 선교지를 평안이 없고 문제가 많다며 피해 가거나 비판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다.
신뢰를 잃은 한국교회와 선교가 다시 회복되려면 평지만 흐르려는 안일함을 버려야 한다. 한계로 느껴지는 장벽 앞에서 하나 되어 힘을 모아야 한다. 자기를 희생하는 폭포가 되어 장벽 너머에도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 장엄하고 경이로운 영적 현장을 찾아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거룩한 섭리를 함께 찬양하는 영성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를 흐르며 다양한 생명을 잉태하고 회복시키는 거대한 강의 원천은,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 흐른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된다. 이 물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이끈다. 물은 길잡이 없이도 크고 작은 바위틈을 따라 끊임없이 생명을 향해 흐른다. 양이 많든 적든, 물은 자신의 여정을 다할 때까지 흙 사이를 헤치고 뿌리를 적시며 나아간다. 이것이 물의 본성이다.
생명의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물방울은 또 다른 물방울과 만나 몸집을 키워간다. 첫 물방울의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생명의 길에서 만나는 물은 언제나 완전한 하나다. 물은 땅 아래 수로를 가득 채우면, 산 중턱이나 대지를 뚫고 나온다. 햇빛 아래서 푸른 잎을 적셔 오색 꽃을 피우고 시내를 이루게 된다.
시내는 땅 위와 땅 아래에 사는 수많은 생명이 함께 부르는 생명의 찬가다. 시내는 쉬지 않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간다. 품고 있는 생명만큼 흐름의 폭이 넓어지고 속도도 빨라진다. 물의 존재 증거는 바로 생명에 있다.
물은 장애물을 만나도 굴하지 않는다. 장애물을 서서히 분해해 굽잇길을 내고, 견고한 바위 앞에서는 소용돌이로 힘을 모은다. 그 힘으로, 보이는 장벽을 부수기보다는 자신을 산산이 부수어 웅장한 굉음과 함께 하늘에는 무지개를 피우고 아래로는 바위의 뿌리를 휘저으며 떨어지는 폭포가 된다.
폭포의 장엄한 굉음은 자신을 이겨내는 울부짖음이고 생명을 잉태하는 절규다. 생명의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장벽에 대한 거룩한 분노다. 그렇게 바위 성에 갇혀 말라가는 강바닥에 다시 생명의 물이 흘러,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채 남은 숨을 몰아쉬던 대지의 생명을 회복한다.
태국어로 어머니를 ‘메’라 하고, 물을 ‘남’이라 하며, ‘강’을 ‘메남’, 즉 ‘어머니의 물,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어머니의 젖은 자신을 녹여 만든 생명의 물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 그 사랑에 근거한다.
선교는 그 사랑의 물방울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강을 이루는 것이다. 물이 생명을 중심으로 시내가 되고 강이 되듯, 선교도 생명을 중심으로 맑은 시내같이 연합하여 쉬지 않고 흘러가야 생명의 강이 될 수 있다. 쉬이 분해되지 않는 바위 같은 벽을 만나면, 생명을 향한 폭포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며 낮은 곳을 향해 떨어져야 한다.
사명은 생명을 위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젖을 먹일 아이가 없는 어미의 젖은 마르고 만다. 생명을 품지 않은 물줄기가 고갈되듯, 선교가 강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젖을 짜내야 할 생명은 없고 대신 물을 흡수해 저장만 하는 물먹는 하마만 있어서다.
한 방울의 물이 자기희생을 반복하며 수천 킬로미터의 강폭을 채우듯, 선교도 자기희생을 통해 생명의 강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생명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선교가 재생산되게 하는 유일한 길이며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를 회복시키는 거룩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살아있는 교회에는 결빙과 해빙이 있다. 생명의 물방울은 그 사이에서 떨어진다. 그 물방울이 생명 대신 돈이나 명예를 좇으면 긴 결빙만 이어질 수 있다. 물방울은 흘러가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힘도 생산한다. 물이 지하를 먼저 흐르듯 교회는 보이지 않는 마음 밭을 먼저 적셔야 한다.
마음 밭이 적셔진 자들만 거룩한 지체로 하나 될 수 있다. 마음 밭을 적신 물이 영혼의 햇빛을 만나고 잎을 적셔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야생화를 피우는 물줄기만이 장애물을 녹이고 굽잇길을 만들어 강이 되고 폭포가 되어 자신을 산산이 부숴뜨릴 수 있다.
한국교회는 생명 예찬을 회복해야 한다. 목사와 선교사가 복음의 물로 자신을 먼저 적시고 양들에게 의존하기 전에 먼저 자기희생을 통한 자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자기희생을 보상이 아닌 사명으로 여겨야 하며 이런 자들의 연합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평지로만 흐르려 한다는 것이다. 장애물 앞에서 당황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고, 하나 되어 천천히 상대를 녹이며 복음의 굽잇길을 만들어야 한다. 장벽이 높다면 그 벽에 부딪혀 소용돌이를 일으켜 힘을 모으고, 그 벽을 넘어 산산이 부서지는 복음의 폭포가 되어 장벽의 뿌리를 파헤치며 마른강에 다시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자기를 희생한 폭포의 웅장하고 장엄한 소리로 죄인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폭포는 장애물 앞에서만 만들어진다. 모든 교회와 선교지에 거룩한 폭포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한다. 호수처럼 잔잔히 흐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좁은 협곡을 긴장하며 흐르면서 전율도 느껴보고 바위와 부딪혀 불필요한 자아를 부숴가야 한다.
교회의 성숙과 선교를 위협하는 장애물은 모두 내부에 존재한다. 자아를 녹여 생명의 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고, 사랑의 물방울을 흡수만 하고 흘려보내지 않는 것이다. 폭포 소리가 나는 교회나 선교지를 평안이 없고 문제가 많다며 피해 가거나 비판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다.
신뢰를 잃은 한국교회와 선교가 다시 회복되려면 평지만 흐르려는 안일함을 버려야 한다. 한계로 느껴지는 장벽 앞에서 하나 되어 힘을 모아야 한다. 자기를 희생하는 폭포가 되어 장벽 너머에도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 장엄하고 경이로운 영적 현장을 찾아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거룩한 섭리를 함께 찬양하는 영성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