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최북단은 미얀마와 마주한 국경선이다. 이 지역 국경 대부분은 해발 약 1500m~2200m에 이르는 높은 산과 깊은 밀림, 그리고 협곡으로 이어진다. 국경 초소나 이민국이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국경선조차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도 제한적이다.
이곳에는 1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들이 각자 고유한 언어와 문화, 풍습을 가지고 이웃 공동체로 살고 있다. 이들은 나와 다른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회주의니, 시장경제니 하는 이념의 갈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고프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만족하는 이들에게 국경은 그저 이웃집, 이웃 마을 정도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 운남지역에서 이주해왔다. 먹거리를 찾아 이동해 온 자들도 있고, 영국의 미얀마 식민지나 일본의 동남아 침략을 피해 숨어들어 온 이들도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장사하러 먼 길을 왔다가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1927년부터 1949년 사이,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93사단과 95사단이 이 지역으로 후퇴해 들어왔다. 93사단은 치앙마이 지역 국경으로, 95사단은 치앙라이 지역 국경지대로 들어갔다. 태국 정부는 이들에게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라고 요구했다. ‘더이메살렁’을 중심으로 한 95사단은 무기를 내려놓고, 태국 ‘펫차분 카우커’에서 벌어진 공산당 박멸 전쟁에 투입되었다. 살아온 이들은 태국 정부의 약속에 따라 국적을 받았으나, 수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치앙마이 아루노타이, 삐양루앙, 반락타이 지역으로 들어간 93사단은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들은 ‘펫차분 카우커’ 전투에도 참여했으나, 전체가 다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지역에 사는 국민당 후손들은 아직도 태국 국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국적이 없어도 이들은 지난 70~80년 동안 밀림을 개간하여 먹고살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모진 삶을 버텨왔다.
‘아루노타이’는 중국 국민당 후예들이 사는 마을 중 가장 인구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이장은 인구를 2~3만 명이라 하고, 자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한 젊은이는 최근 미얀마 내전으로 많은 난민이 유입되어 5~6만 명쯤 될 것이라고 한다. 이들중 국적을 가진 자는 2~3천 명 정도라고 한다.
학생 수가 2300여 명이나 되는 이곳 초등학교 등교 풍경은 삶의 환희 그 자체다. 아이들은 학교 정문 앞까지는 자기 종족의 언어로 엄마 아빠와 주고받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태국어만 사용한다. 태국어를 모르는 엄마 아빠에게 부족어로 통역해주는 귀염둥이도 있다. 엄마 아빠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운 듯, 벌어지는 입가를 애써 꾹 닫으며 미소 짓는다.
보통 두세 명의 아이들을 태운 오토바이 행렬이 짙은 안개를 뚫고 이어진다. 학교 앞 식당에서는 늦잠을 잔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부모들의 모습이 가슴 뭉클하다. 학교 앞 구멍가게 포장 앞은 정미소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떼처럼 북적인다. 아이들의 등교를 안내하는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이 다 되었다고 성화지만 아이들은 장난감과 불량식품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구멍가게 포장마차를 향하는 아이의 엉덩이를 끌어보지만, 역부족이라 하는 수 없이 엄마가 지갑을 연다.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등교하는 착한 오빠나 젖먹이는 등에 업고 첫째 아이 손을 잡아 정문까지 데려가는 엄마의 모습에는 국적 따위의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어미가 딸을 학교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녀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고, 언제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카락은 엉켜있다. 다 해진 옷을 대충 걸치고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 이들에게 희망은 오직 생명이었다.
이제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례 문화가 이 지역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삐앙루앙’ 마을에 사는 90세 할머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분이었다. 장례식장을 꾸미기 위해 60km 떨어진 ‘아루노타이’에서 10여 명이 찾아와 준비를 도왔다. 마을 여인네들은 잡은 돼지로 손님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삐앙루앙’ 중국 학교에는 중국인의 국민 가수였던 ‘떵리쥔’의 기념관이 잘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2~3세들에게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 공간이란다. 마을 외곽에는 화려한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들은 대만을 지지하다가 떠돌이 신세가 된 자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 안내 비석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곳은 중국 본토였다. 16살에 국민당 군인이던 남편을 따라 ‘더이매살렁’에 정착해 11명의 아들딸을 낳고 산 할머니가 말했다. “인제 와서 국민당, 공산당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여….’
자연은 그들이 오가는 길을 막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이 담을 쌓았을 뿐이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빨간색 페인트의 허술한 대나무 차단막이 가로막고 있는 국경 수비대 초소까지다. 건기에는 흙먼지가 가득하고 우기에는 진흙탕이던 길도 이제는 깔끔히 포장되어, 사륜구동이 아니어도 충분히 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다.
코로나 이후 미얀마 내전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이 초소로 들어오는 길마저 막히고 말았다. 나는 30년째 저 너머에 마음을 둔 채 돌아서 나오고 있다. 13KM 떨어진 곳에 한 번도 아비 얼굴을 보지 못한 아이들 30명이 있다. 나는 늘 이렇게 이곳을 서성이지만, 저들을 만날 수 없다.
수많은 경계와 전쟁, 이념의 충돌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온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희망은 ‘살아 있음’ 그 자체다. 생명이 있어서 갖은 멸시와 부끄러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숨이 차오르게 일했다. 이들은 국적보다 생명이 더 소중했다. 생명이 삶의 유일한 소망과 즐거움이었다. 문명은 생명을 차선에 두었는데 자연은 생명 우선이었다.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최북단은 미얀마와 마주한 국경선이다. 이 지역 국경 대부분은 해발 약 1500m~2200m에 이르는 높은 산과 깊은 밀림, 그리고 협곡으로 이어진다. 국경 초소나 이민국이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국경선조차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도 제한적이다.
이곳에는 1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들이 각자 고유한 언어와 문화, 풍습을 가지고 이웃 공동체로 살고 있다. 이들은 나와 다른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 이웃의 언어를 존중하고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회주의니, 시장경제니 하는 이념의 갈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배고프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 만족하는 이들에게 국경은 그저 이웃집, 이웃 마을 정도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 운남지역에서 이주해왔다. 먹거리를 찾아 이동해 온 자들도 있고, 영국의 미얀마 식민지나 일본의 동남아 침략을 피해 숨어들어 온 이들도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장사하러 먼 길을 왔다가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1927년부터 1949년 사이,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 93사단과 95사단이 이 지역으로 후퇴해 들어왔다. 93사단은 치앙마이 지역 국경으로, 95사단은 치앙라이 지역 국경지대로 들어갔다. 태국 정부는 이들에게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라고 요구했다. ‘더이메살렁’을 중심으로 한 95사단은 무기를 내려놓고, 태국 ‘펫차분 카우커’에서 벌어진 공산당 박멸 전쟁에 투입되었다. 살아온 이들은 태국 정부의 약속에 따라 국적을 받았으나, 수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치앙마이 아루노타이, 삐양루앙, 반락타이 지역으로 들어간 93사단은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이들은 ‘펫차분 카우커’ 전투에도 참여했으나, 전체가 다 무기를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지역에 사는 국민당 후손들은 아직도 태국 국적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 국적이 없어도 이들은 지난 70~80년 동안 밀림을 개간하여 먹고살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모진 삶을 버텨왔다.
‘아루노타이’는 중국 국민당 후예들이 사는 마을 중 가장 인구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 이장은 인구를 2~3만 명이라 하고, 자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한 젊은이는 최근 미얀마 내전으로 많은 난민이 유입되어 5~6만 명쯤 될 것이라고 한다. 이들중 국적을 가진 자는 2~3천 명 정도라고 한다.
학생 수가 2300여 명이나 되는 이곳 초등학교 등교 풍경은 삶의 환희 그 자체다. 아이들은 학교 정문 앞까지는 자기 종족의 언어로 엄마 아빠와 주고받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태국어만 사용한다. 태국어를 모르는 엄마 아빠에게 부족어로 통역해주는 귀염둥이도 있다. 엄마 아빠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운 듯, 벌어지는 입가를 애써 꾹 닫으며 미소 짓는다.
보통 두세 명의 아이들을 태운 오토바이 행렬이 짙은 안개를 뚫고 이어진다. 학교 앞 식당에서는 늦잠을 잔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부모들의 모습이 가슴 뭉클하다. 학교 앞 구멍가게 포장 앞은 정미소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떼처럼 북적인다. 아이들의 등교를 안내하는 선생님들은 수업 시간이 다 되었다고 성화지만 아이들은 장난감과 불량식품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구멍가게 포장마차를 향하는 아이의 엉덩이를 끌어보지만, 역부족이라 하는 수 없이 엄마가 지갑을 연다.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등교하는 착한 오빠나 젖먹이는 등에 업고 첫째 아이 손을 잡아 정문까지 데려가는 엄마의 모습에는 국적 따위의 차별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어미가 딸을 학교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녀의 얼굴은 누렇게 떠 있고, 언제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카락은 엉켜있다. 다 해진 옷을 대충 걸치고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아린다. 이들에게 희망은 오직 생명이었다.
이제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례 문화가 이 지역에는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삐앙루앙’ 마을에 사는 90세 할머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 낸 분이었다. 장례식장을 꾸미기 위해 60km 떨어진 ‘아루노타이’에서 10여 명이 찾아와 준비를 도왔다. 마을 여인네들은 잡은 돼지로 손님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삐앙루앙’ 중국 학교에는 중국인의 국민 가수였던 ‘떵리쥔’의 기념관이 잘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2~3세들에게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 공간이란다. 마을 외곽에는 화려한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들은 대만을 지지하다가 떠돌이 신세가 된 자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동묘지 안내 비석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곳은 중국 본토였다. 16살에 국민당 군인이던 남편을 따라 ‘더이매살렁’에 정착해 11명의 아들딸을 낳고 산 할머니가 말했다. “인제 와서 국민당, 공산당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여….’
자연은 그들이 오가는 길을 막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이 담을 쌓았을 뿐이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빨간색 페인트의 허술한 대나무 차단막이 가로막고 있는 국경 수비대 초소까지다. 건기에는 흙먼지가 가득하고 우기에는 진흙탕이던 길도 이제는 깔끔히 포장되어, 사륜구동이 아니어도 충분히 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다.
코로나 이후 미얀마 내전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이 초소로 들어오는 길마저 막히고 말았다. 나는 30년째 저 너머에 마음을 둔 채 돌아서 나오고 있다. 13KM 떨어진 곳에 한 번도 아비 얼굴을 보지 못한 아이들 30명이 있다. 나는 늘 이렇게 이곳을 서성이지만, 저들을 만날 수 없다.
수많은 경계와 전쟁, 이념의 충돌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온 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희망은 ‘살아 있음’ 그 자체다. 생명이 있어서 갖은 멸시와 부끄러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숨이 차오르게 일했다. 이들은 국적보다 생명이 더 소중했다. 생명이 삶의 유일한 소망과 즐거움이었다. 문명은 생명을 차선에 두었는데 자연은 생명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