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태풍 카기지’가 할퀴고 간 상처 중심에, 나와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았지만 당장 달려갈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만 졸이다가 오늘 아침 일찍 그들을 찾아갔다.
8월 27일, 초저녁부터 해발 1,400m 깊은 산악지대에 마치 수돗물을 틀어놓은 듯 폭우가 쏟아졌다. 새벽 1시경 빗물은 진흙과 뒤섞여 아름드리나무들을 쓰러뜨리며 2km가량 밀려 내려와 2,500명이 사는 ‘빵웅’마을 중심부 1km를 휩쓸었다. 산사태는 문명의 콘크리트 위를 고속도로처럼 질주했다.
마을의 피해는 심각했다.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은 말할 것 없고, 마을 절반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고 약 30%는 삶의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사고 후 5일이 지났으나, 그 현장은 여전히 처참했다. 집 7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00여 채는 파손되거나 진흙더미에 묻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다. 11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는 2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희생자 가운데 7명은 미얀마에서 온 타이야이족 노동자 가족이었다(성인 5명 어린이 2명).
산사태로 쏟아져 내린 진흙더미는 먼저 토마토 농장의 농막을 덮쳤다. 그곳에 살던 타이야이족 가족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다. 이들이 농막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옆 마을에 사는 타이야이족의 증언으로 수색이 이뤄졌다. 성인 5명의 시신은 발견되었으나 어린이 2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죽었으나 그들의 삶에는 붉은 줄로 지워야 할 기록도 없고, 화장한 그들의 뼈를 찾아갈 친인척도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이들이 정확히 몇 명이 거주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내가 3시간을 운전해 이곳을 찾은 이유는, 8년 전 이들과의 약속 때문이다. 당시 몽족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이 지역 몽족 마을 교역자들을 만나러 왔다가, 양쪽 산에 가득한 양배추 농장에서 일하는 타이야이족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미얀마의 긴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밀림을 걸어 넘어왔다. 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산을 가꾸어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몽족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딱’ 주에 있는 몽족 마을에는 이런 일꾼 30~50명씩을 데리고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다.
나를 태국 경찰인 줄 알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보고는, 그 농막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들을 섬길 선교사를 찾겠다”고 약속했었다.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그들이 이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부끄러운 빚을 지고 말았다.
태국 정부가 앞장서 복구에 나선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당시 마을 성도가 십 수명 정도였는데, 그 사이 200여 명으로 늘었고, 예배당이 좁아 새 교회당을 짓는 중이었다. 마침 지난주 선교지 단기 문화 탐방을 온 성도들이 주고 간 헌금이 있어서, 그 돈을 이 교회 건축비로 전하며 부탁했다. “이 교회가 타이야이족 노동자들을 품고 살아주십시오”
현장을 떠나기 전, 나는 다시 한번 무너진 집터와 진흙 속에 파묻힌 농막을 바라보았다.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함께 기도하며 손을 내밀어 주는 공동체가 있다면, 이 땅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태풍 카기지’는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휩쓸어 가며, 내게 빚 갚는 삶을 가르쳐주었다.





1km 정도를 떠내려온 자동차


지난주 ‘태풍 카기지’가 할퀴고 간 상처 중심에, 나와의 약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피해가 크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알았지만 당장 달려갈 수 없는 상황이라 마음만 졸이다가 오늘 아침 일찍 그들을 찾아갔다.
8월 27일, 초저녁부터 해발 1,400m 깊은 산악지대에 마치 수돗물을 틀어놓은 듯 폭우가 쏟아졌다. 새벽 1시경 빗물은 진흙과 뒤섞여 아름드리나무들을 쓰러뜨리며 2km가량 밀려 내려와 2,500명이 사는 ‘빵웅’마을 중심부 1km를 휩쓸었다. 산사태는 문명의 콘크리트 위를 고속도로처럼 질주했다.
마을의 피해는 심각했다.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은 말할 것 없고, 마을 절반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고 약 30%는 삶의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사고 후 5일이 지났으나, 그 현장은 여전히 처참했다. 집 7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100여 채는 파손되거나 진흙더미에 묻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다. 11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는 2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희생자 가운데 7명은 미얀마에서 온 타이야이족 노동자 가족이었다(성인 5명 어린이 2명).
산사태로 쏟아져 내린 진흙더미는 먼저 토마토 농장의 농막을 덮쳤다. 그곳에 살던 타이야이족 가족이 가장 먼저 희생되었다. 이들이 농막에 살고 있었다는 것도 옆 마을에 사는 타이야이족의 증언으로 수색이 이뤄졌다. 성인 5명의 시신은 발견되었으나 어린이 2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이 죽었으나 그들의 삶에는 붉은 줄로 지워야 할 기록도 없고, 화장한 그들의 뼈를 찾아갈 친인척도 없었다. 일부 주민들은 이들이 정확히 몇 명이 거주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내가 3시간을 운전해 이곳을 찾은 이유는, 8년 전 이들과의 약속 때문이다. 당시 몽족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이 지역 몽족 마을 교역자들을 만나러 왔다가, 양쪽 산에 가득한 양배추 농장에서 일하는 타이야이족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미얀마의 긴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밀림을 걸어 넘어왔다. 그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산을 가꾸어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몽족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딱’ 주에 있는 몽족 마을에는 이런 일꾼 30~50명씩을 데리고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다.
나를 태국 경찰인 줄 알고 도망치는 아이들을 보고는, 그 농막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들을 섬길 선교사를 찾겠다”고 약속했었다.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그들이 이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부끄러운 빚을 지고 말았다.
태국 정부가 앞장서 복구에 나선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당시 마을 성도가 십 수명 정도였는데, 그 사이 200여 명으로 늘었고, 예배당이 좁아 새 교회당을 짓는 중이었다. 마침 지난주 선교지 단기 문화 탐방을 온 성도들이 주고 간 헌금이 있어서, 그 돈을 이 교회 건축비로 전하며 부탁했다. “이 교회가 타이야이족 노동자들을 품고 살아주십시오”
현장을 떠나기 전, 나는 다시 한번 무너진 집터와 진흙 속에 파묻힌 농막을 바라보았다. 나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함께 기도하며 손을 내밀어 주는 공동체가 있다면, 이 땅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태풍 카기지’는 내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휩쓸어 가며, 내게 빚 갚는 삶을 가르쳐주었다.
1km 정도를 떠내려온 자동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