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수족 축제 이야기
소수민족 사회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축제나 잔치가 많아졌다. 보통 정월 대보름 정도면 끝나던 새해 축제가 이제는 3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에이남린’리수족 마을은 ‘더이낭’산(여자가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모습)과 ‘파쓰아’산(호랑이 절벽)기슭에 자리를 잡은 지 40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태국에 사는 모든 리수족을 마을로 초청해 3일간 축제를 열었다. 전국에서 2천여 명이 모였다.
리수족이 마을을 세우려면,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7가족이 있어야 하고, 세 가지 리더십이 갖춰져야 한다. 리수족의 신 ‘아빠무’와 정령 숭배를 주관하는 주술사 ‘이더머,’ 또 하나는 마을의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 ‘무무파’다. ‘후에이남린’ 마을도 이렇게 10가족이 모여 밀림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40년이 지난 오늘 150여 가정, 500여 명의 주민으로 성장했다.
이들 10가족은 미얀마가 군사 독재가 되면서 삶이 어려워지자,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가르는 ‘머이’강을 넘어 ‘딱’지역으로 이주했다. 미얀마에서 리수족이 가장 많이 사는 ‘카친’주는 중국, 인도와 국경이 맞닿은 곳이다. 품질 좋은 비취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이 카친주에서 ‘북부 샨주’와 ‘와족’ 지역을 지나 카렌족이 중심을 이룬 ‘딱’ 국경까지, 먼 거리를 내려와 태국 국경을 넘었다는 게 의아했다.
태국 정부가 ‘페차분 카우커’ 지역에서 공산 게릴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때 투항한 몽족 게릴라들을 대거 ‘딱’ 국경 지역으로 이주를 시켰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리수족 중 일부가 다시 치앙라이 ‘더이창’산(코끼리 산)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40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축제일, 축구장 크기의 마을 운동장에는 이동식 크레인까지 동원해 대형 차광막이 설치되었다. 운동장 중앙에는 그들의 전통대로 소나무를 잘라 세운 제단이 마련되었고, 정면에는 다양한 경연대회를 위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운동장 주변으로는 먹거리 포장마차와 전통복장을 파는 곳과 전통복장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부스도 준비되었다.
마을 입구에서는 행사 진행 명찰을 단 남자들이 마을을 찾는 차들을 그늘진 곳에 주차하도록 안내했다. 무대 뒤편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이 2천여 명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 화장실도 마련되었다. 2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을 잘라 만든 남자 소변기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용하는 자마다 그 아이디어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첫날은 그들 전통에 따라 민속춤을 추면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순서로 하루를 보낸다. 둘째 날은 ‘팽이치기’ ‘석궁 쏘기’ ‘민속춤 경연’ 등 각종 민속놀이 경연대회가 열리고 셋째 날은 시상식과 손님들을 환송하는 시간을 갖는다. 손님들은 가까운 곳은 30분, 먼 곳은 약 7시간 거리에서 왔다.
전통복장을 한 남녀가 제단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손을 잡고 서서 세줄 기타 ‘쓰브’나 피리 소리에 맞추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대대로 이어온 스텝을 바꾸어 간다. 라후족들은 남녀의 원이 구분되어 있는데, 리수족은 남녀가 한 원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이웃이 서로 손을 맞잡고 앞뒤로 흔들며 이런저런 소식을 나눈다. 옷에 치장한 은장식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랑의 세레나데로 피어나기도 한다.
‘쓰브’의 맑은소리가 산을 울리고 계곡에서 공명을 이룬 메아리가 마을 입구에 들어선 손님들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긴 여정의 피로도 잊은 채 춤사위 사이로 스며 들어가 함께 손을 잡고 정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스텝으로 굳은 몸을 푼다. 이들의 춤사위는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해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이어진다. 늦게 도착한 손님들도 축제의 흥에 빠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밤 9시부터 2시간 동안은 약 1천 명이 20여 개의 원을 그리며 군무를 추는 장관이 펼쳐진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모두 하나 되어, 땅을 스치듯 이어가는 춤사위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라 없이도 중국, 미얀마, 인도, 태국, 라오스, 미국, 프랑스, 등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공동체를 이어온 정신이었다.
제단 주변과 운동장 곳곳에는 음료수와 간식이 쌓여 있어, 춤을 추다가 지친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쉰다. 마을을 찾는 손님들은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손님들이 도착할 때마다, 마을 대표가 나와 그들이 가져온 음료수, 과자, 과일 등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느 마을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확성기를 통해 온 축제장에 감사의 뜻을 알린다.
그러한 공동체의 축제 안에도 세대 간의 틈새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이들 가운데 젊은이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명의 물결도 그 깊이를 더해간다. 성씨마다 의미를 담았던 전통 의상은 이제 화려한 색감과 노출이 많은 디자인으로 바뀌었고 짙은 화장과 성형 수술로 획일화된 얼굴들이 늘어갔다. 고요하고 반복적인 '쓰브'의 리듬은 점차 팝 음악에 밀려났고, 몇몇 젊은이들은 몸을 격렬히 흔들며 흥을 발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청년들은 전통춤을 배우고 쓰브를 연주하는 어른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손님을 안내하거나, 음식을 나르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모습 속에서 이들은 여전히 축제의 중요한 주역이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뿌듯해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미소에는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새로운 세대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준비했을 축제, 그 진심이 낯선 방문객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https://youtu.be/hdxCtnrvS7U?si=SEpMG78BEtYz_8b5
https://m.blog.naver.com/mekongboy/223807328633



리수족 축제 이야기
소수민족 사회에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축제나 잔치가 많아졌다. 보통 정월 대보름 정도면 끝나던 새해 축제가 이제는 3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후에이남린’리수족 마을은 ‘더이낭’산(여자가 손을 모으고 누워있는 모습)과 ‘파쓰아’산(호랑이 절벽)기슭에 자리를 잡은 지 40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태국에 사는 모든 리수족을 마을로 초청해 3일간 축제를 열었다. 전국에서 2천여 명이 모였다.
리수족이 마을을 세우려면, 서로 다른 성씨를 가진 7가족이 있어야 하고, 세 가지 리더십이 갖춰져야 한다. 리수족의 신 ‘아빠무’와 정령 숭배를 주관하는 주술사 ‘이더머,’ 또 하나는 마을의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 ‘무무파’다. ‘후에이남린’ 마을도 이렇게 10가족이 모여 밀림을 개간하고 마을을 이루었다. 40년이 지난 오늘 150여 가정, 500여 명의 주민으로 성장했다.
이들 10가족은 미얀마가 군사 독재가 되면서 삶이 어려워지자,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가르는 ‘머이’강을 넘어 ‘딱’지역으로 이주했다. 미얀마에서 리수족이 가장 많이 사는 ‘카친’주는 중국, 인도와 국경이 맞닿은 곳이다. 품질 좋은 비취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이 카친주에서 ‘북부 샨주’와 ‘와족’ 지역을 지나 카렌족이 중심을 이룬 ‘딱’ 국경까지, 먼 거리를 내려와 태국 국경을 넘었다는 게 의아했다.
태국 정부가 ‘페차분 카우커’ 지역에서 공산 게릴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때 투항한 몽족 게릴라들을 대거 ‘딱’ 국경 지역으로 이주를 시켰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리수족 중 일부가 다시 치앙라이 ‘더이창’산(코끼리 산) 지역으로 이주해 살다가, 40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축제일, 축구장 크기의 마을 운동장에는 이동식 크레인까지 동원해 대형 차광막이 설치되었다. 운동장 중앙에는 그들의 전통대로 소나무를 잘라 세운 제단이 마련되었고, 정면에는 다양한 경연대회를 위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운동장 주변으로는 먹거리 포장마차와 전통복장을 파는 곳과 전통복장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부스도 준비되었다.
마을 입구에서는 행사 진행 명찰을 단 남자들이 마을을 찾는 차들을 그늘진 곳에 주차하도록 안내했다. 무대 뒤편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이 2천여 명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동 화장실도 마련되었다. 20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을 잘라 만든 남자 소변기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용하는 자마다 그 아이디어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첫날은 그들 전통에 따라 민속춤을 추면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순서로 하루를 보낸다. 둘째 날은 ‘팽이치기’ ‘석궁 쏘기’ ‘민속춤 경연’ 등 각종 민속놀이 경연대회가 열리고 셋째 날은 시상식과 손님들을 환송하는 시간을 갖는다. 손님들은 가까운 곳은 30분, 먼 곳은 약 7시간 거리에서 왔다.
전통복장을 한 남녀가 제단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손을 잡고 서서 세줄 기타 ‘쓰브’나 피리 소리에 맞추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대대로 이어온 스텝을 바꾸어 간다. 라후족들은 남녀의 원이 구분되어 있는데, 리수족은 남녀가 한 원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이웃이 서로 손을 맞잡고 앞뒤로 흔들며 이런저런 소식을 나눈다. 옷에 치장한 은장식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랑의 세레나데로 피어나기도 한다.
‘쓰브’의 맑은소리가 산을 울리고 계곡에서 공명을 이룬 메아리가 마을 입구에 들어선 손님들의 가슴을 들뜨게 한다. 긴 여정의 피로도 잊은 채 춤사위 사이로 스며 들어가 함께 손을 잡고 정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스텝으로 굳은 몸을 푼다. 이들의 춤사위는 보통 아침 10시부터 시작해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이어진다. 늦게 도착한 손님들도 축제의 흥에 빠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밤 9시부터 2시간 동안은 약 1천 명이 20여 개의 원을 그리며 군무를 추는 장관이 펼쳐진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모두 하나 되어, 땅을 스치듯 이어가는 춤사위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라 없이도 중국, 미얀마, 인도, 태국, 라오스, 미국, 프랑스, 등에 흩어져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공동체를 이어온 정신이었다.
제단 주변과 운동장 곳곳에는 음료수와 간식이 쌓여 있어, 춤을 추다가 지친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고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쉰다. 마을을 찾는 손님들은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다. 손님들이 도착할 때마다, 마을 대표가 나와 그들이 가져온 음료수, 과자, 과일 등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느 마을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확성기를 통해 온 축제장에 감사의 뜻을 알린다.
그러한 공동체의 축제 안에도 세대 간의 틈새는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이들 가운데 젊은이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문명의 물결도 그 깊이를 더해간다. 성씨마다 의미를 담았던 전통 의상은 이제 화려한 색감과 노출이 많은 디자인으로 바뀌었고 짙은 화장과 성형 수술로 획일화된 얼굴들이 늘어갔다. 고요하고 반복적인 '쓰브'의 리듬은 점차 팝 음악에 밀려났고, 몇몇 젊은이들은 몸을 격렬히 흔들며 흥을 발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청년들은 전통춤을 배우고 쓰브를 연주하는 어른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손님을 안내하거나, 음식을 나르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모습 속에서 이들은 여전히 축제의 중요한 주역이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뿌듯해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미소에는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과 새로운 세대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준비했을 축제, 그 진심이 낯선 방문객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https://youtu.be/hdxCtnrvS7U?si=SEpMG78BEtYz_8b5
https://m.blog.naver.com/mekongboy/223807328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