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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성씨를 찾아서<1> “뿌리를 찾아서 자랑스러운 吳氏”

Online Team
20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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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성씨를 찾아서<1> 오씨



(사진 제공 : 오씨 종친회)


吳氏의 유래는 춘추전국시대 중국 장강(양쯔강) 부근의 주나라 제후국이었던 오(吳)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중국 양쯔강 부근의 주나라 일족으로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 태왕(周太王)의 장남인 오 태백(吳太伯)을 시조로 하여 희성(姬姓)에서 나왔다.


제후국 오(吳)나라는 주 태왕의 장남 오태백을 초기 군주로 시작하여 하대 자손인 부차의 손자인 루양부터 주나라 천자로부터 吳 성을 하사받아 오 씨가 되었으며, 비로소 오(吳)나라의 왕으로 되었다.


태백 왕의 25세손인 초나라 재상 오기(吳起)의 45세손인 오첨(吳瞻)이 500년(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오첨(吳瞻)은 왕명으로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吳씨는 많은 성씨처럼 한국의 토속 성씨가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성씨다. 그 유래는 오월동주라는 고사성어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 월나라 왕 구천과 견원지간이 되어 싸웠던 사람으로 하대 자손인 오나라의 부차 왕 그의 손자 루양이 천자로부터 吳氏 성을 하사받아 吳氏가 생겼다고 전한다. 이외 초나라의 吳氏 등 다른 설화가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기원전 1100년대 주나라 때 吳의 초대 제후인 태백 할아버지가 우리의 시조이다. 그는 주나라(周)의 시조 고공 담보의 장남으로 중옹(仲雍)과 계력(季歷)이 형제이며, 주나라 2대 왕 문왕이 조카가 된다. 기원전 12세기에서 11세기 경의 인물로, 왕위 계승 서열 1위였지만 조카에게 황제의 위를 양보하고 제후의 한 명이 됐다. 현재 시조 사당은 吳나라의 수도였던 장쑤성 쑤저우에 있으며 '오(吳)'는 '매우 높다, 고귀하다'는 뜻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吳氏의 분포 비중은 11~13위 정도로 대성의 문중입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인구수가 꾸준히 증가해 지금은 서 씨나 권 씨보다도 많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763,281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2015년 당시 51,069,375명) 중 약 1.49%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吳氏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으며 소수이긴 하지만 일본과 베트남에도 있다.


중국에서는 10위를 차지하며 2,000만 명이 넘는 대성이며, 베트남에서는 약 1.3%의 12위를 차지한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인구 순위가 상당히 높은 성씨이다.


한국 나주에는 왕건과 吳氏 부인 장화왕후가 만났다는 전설이 깃든 완사천 있다. 우물가에 있던 吳氏 부인이 물이 달라던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을 건넸고, 吳氏 부인의 지혜를 높이 산 왕건이 부인으로 맞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후에 吳氏 부인은 장화왕후가 되었고, 그의 아들이 고려 2대 임금인 혜종이다.


조선 성씨 통보에는 210본까지 기록되 있고 동국 만성 보에 의하면 吳氏는 20여 본이 있다고 한다. 吳氏 대동종친회에 의하면, 가장 먼저 득관한 것은 고창 吳氏로 보고 있다.


吳氏는 중국에서 온 때가 서로 다른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향파로 신라 지증왕 때 온 오첨(吳瞻)을, 다음은 경파로 고려 성종 때 중국 송나라에서 온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한다. 향파는 ‘吳氏삼십세계도(1397)’를, 경파는 ‘해주吳氏 족도’를 연원기록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 경파 시조단이 있고 충남 공주에 향파 시조단이 있다.


1397년 오탁진이 작성한 ‘吳氏삼십세계도’에 근거하면 吳氏의 도시조는 500년(지증왕 1)에 중국에서 신라로 입국했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오첨(吳瞻)이다. 오첨(吳瞻)은 태백왕의 25세손인 초나라 재상 오기(吳起)의 45세손이다. 오첨은 김종지(金宗之)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양에서 2남 1녀를 두고 22년을 살다가 521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나이가 어려 중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신라에 남아 함양에서 살게 되었다. 


오응의 12대손 오광우가 980년 다시 송나라로 귀국해 그의 현손인 오연총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다.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여진을 토벌해 1114년 추충공신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이 됐다. 오연총의 5세손인 오수권이 오현보, 오현좌, 오현필이라는 세 아들을 두는데, 이들이 1216년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군을 격퇴했다. 그 공으로 각각 해주군, 동복군, 보성군에 봉해져, 해주 吳氏 향파, 동복 吳氏, 보성 吳氏의 시조가 되었다.


한국 吳氏 사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해주 吳氏(462,704명)가 전체 吳氏 인구(763,281명)의 과반을 차지한다. 이어 동복 吳氏(72,394명)와 보성 吳氏(71,162명)를 포함한 3개 본관이 전체 오씨 인구의 약 80%를 차지고 있는 대성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함양, 나주, 군위, 고창, 낙안, 장흥, 화순, 함평, 울산 등 본관이 존재한다.


여기서 해주 吳氏는 경파, 향파를 합쳐 조선시대 문과급제자 99명, 무과급제자 269명, 생진사326명 등을 배출한 명문이다. 조선 중기 인조, 현종,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정승과 대제학, 판서를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동복 吳氏는 향파로 고려, 조선시대에 정승을 다수 배출 했다. 특히 숙종때 중앙 정치의 주류를 형성 했다.


동복은 전라남도 화순군의 옛 지명으로 기호학파의 중심지였지만 남인 문중 이다. 보성 吳氏도 향파 집안으로 서기 500년 지증왕때 남제의 사신으로 온 오첨과 그 차남을 시조로 한다. 오첨(吳瞻)의 24세손인 오현필(吳賢弼)이 1216년(고종 3)에 거란군을 격퇴한 공으로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고 화순지역 수령을 지냈다. 본은 전남 보성이지만  청주시(구 청원군) 현도면의 오박사마을(吳博士村)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吳氏의 발음은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한동안은 'ᅌᅩ'라고 썼으나 초성에 오는 ㆁ(옛이응)이 소실되면서 '오'로 변하였다. 또한 표준 중국어로는 Wú(우), 광동어로는 Ng(응)으로 발음된다. 일본어로는 음독으로 ゴ(고), 훈독으로 くれ(구레)라고 발음한다.


베트남어에서는 한자음의 ŋ 음가가 소멸되지 않아 Ngô(응오)로 발음된다. 한국에선 ŋ 음가를 일본의 영향을 받아 '고'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에 따라 과거 베트남 초대 공화국 총통(대통령) 응오딘지엠을 '고 딘 디엠'으로 표기했었다.


연합뉴스에서 발간한 한국인물 사전에 국내 정관계를 비롯하여 법조, 경제, 학계, 언론, 문화예술, 체육, 종교계 등 각분야의 300여명을 수록 했다. 이중 ▲정치계 오제세 전국회의원, 오신환 전국회의원 등▲관계 오세훈 서울시장, 오영훈 제주지사, 오영교 전 행안부장관 등 ▲학계. 오응준 전 대전대총장, 오덕균 전 충남대총장, 오용준 한밭대총장 등 ▲예술계 오석근 영화감독, 오명희 수원대교수 등 ▲경제계 오규석 C & M 커뮤케이션대표 등 ▲언론계 오동헌 SBS 본부장(상무이사) 오영균 대기자 ▲체육계 오노균 국제무예올림피아드총재, 오상욱 파리올림픽 펜싱 금메달 ▲종교계 오정호 새로남교회담임목사,  오현 신흥사 조실스님 등이 맹활동 하고 있다.



<한국 대전 충남 吳씨 종친회 수석 부회장 오노균 박사( 吳박사촌 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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