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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김명숙 아리랑시니어센터 전 이사장 “한인사회 인구 감안하면 침상 600개는 더 있어야”

Online Team
202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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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요양원 되찾아오기 주역



<사진> TORONTO K JOURNAL


기다리는 어르신 250명에 침상은 60개.

아리랑요양원 현재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대로 가면 대기자들은 5년, 10년이 가도 입주가 요원한 실정이다.

대기 명단에 올려 놓았다가 다른 요양원으로 발길을 돌린 분들이 훨씬 많다. 기다리다 돌아가신 분들도 적지 않다.

명단에 있는 250명이 전부가 아니다. 어차피 입주가 어렵다는 걸 알기에 아예 신청하지 않은 한인 어른들은 셀 수조차 없다.

현재 한인사회 인구 구조라면 요양원 침상이 적어도 600개는 돼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지금의 딱 10배다. 그러나 제2, 제3 요양원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비관할 필요는 없다. 한인사회는 이미 아리랑요양원을 되찾아온 저력을 발휘한 바 있다. 남녀노소, 종교, 지역 가리지 않고 서명운동, 모금운동에 참여해 잃을 뻔했던 60석 요양원을 한인사회 품에 다시 안았다.

그때 그 현장 맨앞에 서 있던 사람이 있었다.

[조영권이 만난 이웃사람] 7번째 손님으로 김명숙(73) 아리랑시니어센터 전 이사장을 초대했다.



-대단했지요. 저도 밖에서 그 과정을 지켜봤는데 참 감동적이었어요.

▲한인사회 잠재력이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해요.

당시 무궁화요양원은 법정관리 상태였고 곧 입찰을 통해 다른 커뮤니티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2017년 7월. 한인 어르신을 위한 순수 봉사 단체였던 아리랑시니어센터를 중심으로 무궁화요양원 인수 추진 위원회가 구성됐다.  아리랑시니어센터 이사였던 김회계사는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즉시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목표 금액은 350만불. 추진위 멤버들조차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단 3개월만에 목표를 넘어섰다.


-아마 토론토 한인사회 역사상 이렇게 한마음으로 뭉친 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맞아요. 한인사회 새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었어요.

모금만 되면 나머지 과정은 순조로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 채권단을 대표해 딜로이트 회계법인이 무궁화요양원 법정관리를 맡고 있었다. 딜로이트는 채권 회수를 최대한 유리하게 하려고 공개 입찰을 택했다. 추진위는 2018년 1년 내내 준비에 매달렸다.

2019년 1월 공개입찰이 진행됐다. 숨죽여 기다렸지만 결과는 탈락. 추진위를 중심으로 한인사회 전체가 똘똘 뭉쳐 거사를 치렀는데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경쟁 업체는 노련한 ‘선수’ 였다. 요양원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데다 이 같은 입찰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아리랑도 당초 계획보다 큰 액수를 적어냈는데 그 업체는 한술 더 떠 100만 달러를 올려 낙찰을 성공시켰다.

 인수 실패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한인사회에 실망이 퍼져 나갔다. 앞장섰던 아리랑시니어센터 구성원들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죄인이 된 듯한 심경이었다.  


-모금한 돈 처리를 놓고 기부자들 사이에서 약간 말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 추진위는 당연히 돌려주거나 기회가 있다면 다시 도전해보려 했는데…


기부자들 가운데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음이 커지기 전에 추진위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019년 8월 전액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이때 김회계사가 아리랑시니어센터 이사장을 맡았다. 뒷수습에 나선 것이다.  


-사실 좋은 일에 앞장서는 것보다 일이 잘못됐을 때 수습하는 게 더 어렵잖아요.

▲ 제가 이사장으로서 첫 업무가 기부금 반환수표에 서명하는 일이었어요.


사람이든 사회든 좋을 땐 모른다. 위기가 닥쳐봐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입찰에 실패하자 일부는 지체없이 달려와 기부금 체크를 찾아갔지만 많은 한인들이 함께 걱정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고 격려했다. 기부금을 돌려주겠다고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도 그저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한인사회를 위해 좋은 일에 쓰라거나 다음 기회가 생기면 그때 다시 추진해보라는 거였다.  50만불을 기부했던 신중화 씨는 “그 돈은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추진위에서 알아서 좋은 일에 쓰라”며 극구 사양했다.


-두번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지요.

▲ 코비드가 비극이었지만 우리에겐 역설적으로 고마운 존재이기도 했어요.


2019년 말 코비드가 시작됐다. 2020년 무서운 기세로 퍼져 나갔다. 건강 취약 계층이 몰려 있는 노인 관련 시설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무궁화요양원을 인수하기로 한 유대인 업체 소속 요양원에서 특히 사망자가 많았다.  그 업체의 부실 운영 실태가 드러나자 여론이 들끓었다. 한인 어르신들을 이런 위험한 곳에 보낼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여론전에 나섰다. 주류 매체들도 한인사회가 요양원을 되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전했다. 온라인 서명운동에도 앞다퉈 참여했다.

딱 1년만에 결실이 나왔다. 2021년 2월 해당 업체는 무궁화요양원 인수를 포기했다. 아리랑시니어센터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극적인 반전이었다.


-이제 정말 이사장으로서 본연의 일을 하시게 됐군요.

▲ 곧바로 2차 모금운동을 시작했어요. 1차 때보다도 더 뜨겁더군요.


2021년 3월. 기부금 반환 업무는 곧바로 모금운동으로 전환됐다. 

한인사회 저력이 다시 드러났다. 최등용 키치너 홈하드웨어 사장이 100만불을 쾌척했다. 이는 온타리오 한인사회 역사상 최고 기부액이다.

1차 모금에 이어 이때도 단 3개월만에 목표액 450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 뒤 과정은 순조로웠다.

법원은 마침내 2021년 9월 무궁화요양원 소유권 변경을 승인했다. 아리랑시니어센터가 한인사회 유일한 요양원을 소유, 운영하게 된 것이다.

기적이자 한인사회의 승리였다.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자리를 맡아 수고하셨는데요. 사실 그때 개인적으로 쉽지 않았을텐데요.


인터뷰를 위해 빗속을 뚫고 가면서도 내내 망설였다. 이 얘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시 김회계사는 참척의 아픔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와중에 이사장직을 맡았다.

필자에게 여러 사람들이 그때 얘기를 전해줬다. 주변에서 많은 이들이 김 전이사장을 걱정해줬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표정 한번 드러내지 않고 꿋꿋하게 한인요양원 인수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인수 작업이 끝난 다음 바로 이사장직을 사임했지요.

▲ 큰 일은 끝났고 또 개인적으로 사정도 있었고…


아리랑시니어센터는 2023년 요양원 이름을 아리랑한인요양원으로 바꿨다. 무궁화보다는 아무래도 아리랑이 캐나다 사회에서 더 잘 알려져 있고 친숙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명칭 변경과 함께 요양원 운영이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 걸 본 김 회계사는 이사장 직을 내려 놓았다. 요양원 인수 작업을 열정적으로 했던 김도헌 박사가 후임 이사장을 맡았다.


-한인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사가 이뤄질 때 현장에서 앞장 서셨군요.

▲ 아리랑시니어센터가 2013년 출범할 때 창립 멤버로 참여했어요. 구성원들 모두 참 열심히 일했고 보람도 컸지요.


아리랑시니어센터는 2013년 출범했다. 김은희 변호사가 초대 이사장으로 12명 이사들이 한인 어르신을 위해 데이 케어, 교육 등 소박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요양원 인수, 운영이라는 거대하고도 전문적인 일은 초기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결국 해냈고 이 과정에서 한인사회에 통합, 희망, 이웃사랑이라는 화두를 뿌리내리게 하는 더 큰 결실을 거두었다.


-그 전엔 한인교향악단 일을 열심히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교향악단이 출범할 때부터 참여했어요. 처음엔 학부모 자격이었지요.


김 전이사장은 음악과 인연이 깊다. 중고등학교 때 내내 바이올린을 배우며 연주했고 클래식에 묻혀 살았다.

나이 먹어가면서도 늘 마음 속엔 음악에 대한 향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 아들도 어렸을 때부터 음악으로 이끌었다. 큰 아들은 바이올린, 둘째는 첼로.

한인교향악단은 가뭄의 단비였다. 개인적인 관심도 컸지만 아들들이 초기부터 참여했다.  

회계사란 직업 덕분에 재무 관련 일을 도맡아 지원했다.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2000년엔 이사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김 회계사는 “몇 번을 고사했으나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맡았는데 그만 12년 이상 그 자리에 머물게 됐다”며 웃었다.


-개인적인 얘기 좀 해보겠습니다. 유종수 교수가 여기 계셔서 토론로로 오신 거지요?

▲ 예, 맞아요. 큰 오빠 때문에 제가 토론토로 오게 됐어요.


김 전이사장이 캐나다에 첫발을 딛은 건 1976년. 1974년 이화여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해외로 나갈까 고민하던 그에게 집안 장남이자 가장 큰 오빠인 유종수 박사가 캐나다를 권했다. 유박사는 그때 알고마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명숙 전이사장 결혼 전 본명은 유명숙)

당시 김 전이사장은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신부였다. 새 신랑과 함께 신혼여행 하듯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편은 김연수 전 평통 토론토지회장.

이민 생활은 신혼 여행이 아니었다.


-이민인가요, 유학인가요?

▲ 사실 제가 대학 다닐 때 집안 형편이 기울어서 어려웠어요. 대학원이나 유학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대학 졸업 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짧은 시간 회사를 다니다 결혼했고 캐나다로 오게 됐다.

아이 낳고 살림을 하면서 돈도 벌고 공부를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공장에 취업하거나 가게 점원으로 일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머릿속엔 온통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회계사 공부는 언제 하셨어요?

▲ 둘째 아이를 낳은 뒤 결단을 내렸어요. 더 늦기 전에 일단 부딪쳐 보자…


82년 나이 30에 다시 책을 잡았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공부 이외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또 두 아이를 키우며 한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다행히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수학을 좋아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시험준비를 했다. 그래도 고비고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때마다 남편과 오빠가 응원했다.

천신만고. 말이야 쉽지만 아무튼 2년 동안 죽어라 한 덕분에 84년 최종 합격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형제 얘기도 좀 하기로 하죠. 전북에서 유명한 수재 집안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경제학 박사가 많은…

▲ 집안 얘기를 하는 건 좀 쑥스럽긴 한데…남자 형제 4명이 모두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지요. 동생 한 명만 빼고 모두 경제학을 공부했어요.


이 집안 장남인 유종수 박사는 뉴욕 주립대에서 학위를 받고 1971년부터 2007년까지  수센머리에 있는 알고마대학 교수를 지낸 뒤 현재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둘째 오빠인 유종근 박사는 전라북도 지사와 김대중대통령 경제 고문을 역임했다. 동생인 유종성, 유종일 박사는 하버드대에서 행정학, 경제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유종성 박사는 경실련 사무총장 등을 지낸 시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고, 유종일 박사는 KDI 국제대학원장을 지내고 요즘 이재명 민주당 전대표 씽크탱크인 ‘성장과 통합’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이길 경우 유종일 박사가 대한민국 경제 정책을 총괄하게 된다.


-왜 형제들이 유독 경제학 쪽으로 몰리게 됐나요?

▲ 큰 오빠 영향이 컸어요. 집에 경제학 책들이 많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됐지요.


장남인 유종수 박사가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닐 때부터 집안에 경제학 책들이 쌓였다. 동생들은 굳이 권유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경제학을 접할 수 있었다. 김 전이사장이 경영학과로 진로를 정하는 데엔 둘째 오빠인 유종근 전지사 조언이 컸다고 한다.


-형제들이 다들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건 집안이 부유한 덕분이었겠지요.

▲ 아니어요. 어렸을 때 살림이 넉넉했던 건 맞아요.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참 많이 힘들었어요.


어린 시절 정읍에서 살 때 아버지가 미곡상을 운영해 집안이 꽤 부유한 편이었다. 서울에 집을 사서 형제들을 올려 보낼 정도로 넉넉했다.

김 전이사장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빠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에 진학했다. 일요일마다 엄마 보고 싶다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미곡상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살게 됐다. 그러나 시련이 시작됐다.

아버지가 연거푸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학교 다니는 것조차 버거운 형편이었다.

70년대 시절, 돈 많다고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형제들은 집에서 도움받을 형편이 못되기도 했지만 다들 성적이 탁월해 국비로 각자 길을 개척했다.


-그래도 부모님은 성공하신 편이네요. 사업에 실패했지만 자식 농사는 잘 지었으니까요.

▲ 하하~그런 셈이네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시작도 마지막도 인터뷰 주제는 요양원이었다.

아리랑요양원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됐으니 이제 남은 건 제2요양원이다. 한인사회에서 제2 요양원에 관심을 갖는 단체나 개인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들을 한데 묶어 실행으로 옮기는 것. 아무래도 성공 경험을 축적한 아리랑시니어센터가 중심이 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다.

현재 아리랑시니어센터는 강대하 이사를 제2요양원 추진위원장으로 추대해 여러 가능성을 모색중이다. 아직 의미 있는 진전은 없다.

그러나 머지 않아 한인사회에 좋은 소식이 전해질 날이 올 것이다. 김명숙 전이사장의 헌신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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