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소식대마도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와 비운의 황녀, 덕혜옹주의 이야기

고용철KoYongChul
202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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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 위치한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는 역사의 아픔과 함께 덕혜옹주의 비운의 삶을 상징하는 장소다. 이 기념비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일제강점기 시대의 아픈 역사와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녀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 황제의 외동딸로, 1931년 일본 대마도 도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이 결혼은 덕혜옹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강제적인 것이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기념비는 단순히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를 넘어,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덕혜옹주는 결혼 후 정신질환을 앓으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덕혜옹주의 삶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비극적으로 펼쳐졌다.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고, 강제 결혼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강제 유학과 결혼: 덕혜옹주는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외로움과 문화적 충격을 겪었다. 이후 19살에 소 다케유키 백작과 정략결혼을 강요당했고, 이는 덕혜옹주의 삶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정신질환과 고통: 결혼 후 덕혜옹주는 조울증,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고, 이는 그녀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기도 했으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한국으로의 귀환과 말년: 1962년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정신질환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고, 1989년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는 역사적 의미와 함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의 강제적인 결혼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할 때 기념비의 존재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는 덕혜옹주라는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은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덕혜옹주의 눈물 / 고용철

 

대마도 섬 끝, 쓸쓸히 서 있는 비석

망국의 그림자 드리운 옛 성터에

덕혜옹주, 그 이름 새겨진 곳에

한 맺힌 꽃잎 흩날리는 슬픈 노래

 

강제로 맺어진 결혼, 낯선 땅에서

꽃 피울 날 없이 시들어간 청춘

정신병원 감옥 속, 갇힌 영혼은

밤마다 망국의 그림자에 떨었다네

 

일제 강점기,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대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는 울었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진 채

꽃잎처럼 스러져 간 고귀한 생애

 

돌아온 고국, 낙선재 정원에서

쓸쓸히 피어난 꽃 한 송이 되어

그녀의 삶, 역사의 아픔으로 남아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절규

 

대마도 바람은 오늘도 쓸쓸히 불고

망국의 아픔을 간직한 기념비

덕혜옹주의 한이 서린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발행인 : 고용철   편집인 : 임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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